작가노트

포월 抱越


강주리



이번 개인전 ‘포월(抱越, Layered Beyond)’은 회화 속 화면을 점유해 가는 과정과 작업을 대하는 태도에 집중했던 2025년 10월 개인전 ‘무향시간(無向時間, No Arrow of Time)’의 연장선이다. 언제든지 재배열할 수 있는 가변성을 가진 21점의 패널로 서사적 완결을 향해 나아가려는 시도를 배제했던 작업 <기라성>과 유용성과 무용성의 경계를 고민하며 한지장과의 협업 과정 속 반복과 찰나, 우연과 오류에 집중했던 작업 <현자의 돌을 찾기 위한 의식>을 기반으로 이번 전시의 시작이 된 아티스트 북을 기획하게 되었다. 


지난 개인전과 아티스트 북 제목인 ‘무향시간(無向時間)’은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되어 한 방향으로 흐른다고 여겨지는 물리학적 개념 '시간의 화살(Arrow of Time)'과 상반되는 개념으로, 시간의 흐름은 인간의 의식이 만들어 낸 현상이며, 시간을 공간과 유사한 차원으로 간주하여 모든 사건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보는 관점을 뜻한다. 이는 시간의 흐름이 관측자의 속도와 중력에 따라 상대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무향시간'은 한 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닌, 순간으로 존재하며 무한히 긴 시간을 소진하는 노동과 찰나의 선택이 교차하는 나의 작업 과정을 은유한다.


아티스트 북 ‘무향시간’은 자연과 문명, 유기체와 무기체, 과거와 현재, 실재와 환영의 경계가 해체된 세계를 책이라는 매체 안에서 구현한 작업이다. 선형적으로 읽히는 매체인 책에서 시간의 방향성을 거부하는 비선형적 구조를 통해 '순간으로 존재하는 시간', '동시 존재하는 구조', '반복되는 노동', '찰나의 선택'을 경험하고, 다양한 시간 안에 머무는 행위를 제안한다.


나의 작업 방식은 수집하고, 분류하고, 관찰·기록하는 드로잉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주요 매체인 종이와 잉크로 혼성된 형상과 내러티브를 구축하며, 그리는 행위에 즉각 반응하여 순간의 결정이 화면의 변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여러 단선을 교차하고 반복적으로 쌓아 올리는 크로스해칭(cross-hatching)은 단순한 회화 기법이 아닌 증식과 충돌의 구조다. 단선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겹쳐지고, 반복되고, 침범하며 서로의 밀도와 방향을 바꾸면서, 자라나듯이 형상이 그려진다. 혼성된 형상들은 아름답거나 기이한 대상으로만 머무르지 않고, 자연과 인공, 생태와 문명 등 이분법적 인간 중심의 분류 체계에 질문을 던진다. 양면성은 모순이 아니라 가치의 중첩이며, 그 중첩은 내 작업 속 해소하지 않고 유지된다. 유기체와 무기체는 서로를 흡수하고, 과거와 현재는 한 화면에서 동시에 작동한다. 실재와 환영은 분리되지 않고 같은 층위에서 경험된다.


2026년작 ‘경계 흐린 존재들’은 2024년부터 이어오고 있는 전주 한지장들과의 협업으로 손질된 닥섬유를 발로 흔들어 떠서 압착하고, 건조하고, 염색해서 말린 순닥지를 주 매체로 한다. 식물/동물, 개체/집단, 생/사, 감각/현실의 경계를 흐리는 생태계 드로잉 후, 그 종이들을 겹치고 물에 적셔 닥이 서로 엉겨 붙도록 주무른 후 말리고, 그리는 과정을 반복한 작업이다. 선, 이미지, 매체의 층위적 축적과 얽힘의 작업이다. 각기 고유한 시간성과 지속을 품은 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중첩되고 간섭한다. 이미지가 나아가야 할 방향 또는 시작, 도달해야 할 끝은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층위들이 동시에 활성화된 채, 겹치고 교차하며 지속되는 축적의 상태로서 존재한다. 


디지털 드로잉 영상 작업 ‘박동하는 돌’은 코로나 팬데믹 때, 처음으로 시도해본 디지털 작업으로 종이나 캔버스와 다르게, 비어있는/열려있는 공간 속 부유하는 선들과 인간의 눈으로 식별은 한계가 있지만 무한히 겹쳐질 수 있다는 사실이 매력적이었다. 다양한 개체들이 여러 층위로 쌓여, 돌처럼 더 단단한 무언가가 되는 과정을 연속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다. 


내가 시도하는 '경계 넘기' 무언가를 벗어나는 초월을 의미하지 않는다도약이 아니라 지속적인 침식과 퇴적으로 점차 흐려지거나 짙어지며 재구성되는 것이다형상은 여전히 변화 중이고선은 계속 쌓일 가능성을 남긴다안고 넘어간다는 뜻의 ‘포월(抱越)’.  전시는 계속 변이 중인 생태계의 단면으로완결을 제공하지 않고 열려 있고자 한다관객이  생태계에 잠시 '참여'하는 사건이 되기를 바란다.